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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 특집/ 귀금속 전승공예의 거장, 황갑주 장인의 삶과 작품 세계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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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귀금속보석신문 댓글 0건 조회 123회 작성일 24-12-23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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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갑주 장인의 ‘귀금속 전승공예 입문 70주년 회고전’을 가다

입문 70년 인생의 수많은 국보급 작품들 선보여

황갑주 장인 아낌없이 전 작품 국가에 기증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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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황갑주 장인의 한민족 5천년 귀금속보석 전승공예 입문 70주년 회고전이 열렸다. 지난 1015일부터 20일까지 용산구청 아트홀에서, 실제 주옥으로 빚어진 국보급 전승공예 작품들이 전시됐다.

이 회고전은 9년 전인 지난 201511월 열린, ‘황갑주 장인 한국귀금속전승공예 입문 제61주년 회갑 작품전때 이미 예고됐었다.

황 장인이 당시 발표한 작품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 이후의 귀금속 공예 유물들을 재현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황 장인은 3국시대 이전인 고조선 시대의 귀금속 보석 공예 유물까지 포함해, 한민족 5천년의 귀금속 전승공예 작품들을, 70주년 회고전에서 선보이겠다고 다짐했다.

당시만 해도 그의 그러한 발표에 대해 사람들은 다들 반신반의했다. 그 때 황 장인의 나이는 만 76.

입문 70주년이면 연세가... 그 때까지 살아 계시기만 해도 다행이라고들 가볍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황 장인은 정확히 입문 70주년을 맞아, 매우 건강한 모습으로 한민족 귀금속공예 5천년사를 재현해 냈다.

 

15세에 업계 입문

황 장인은 1939년생이다. 15살 되던 해인 1954년에 주얼리 공장 견습생으로 업계에 발을 디뎠다. 올해로 만 85, 세밀하기 그지없는 귀금속공예 세공 일을 하기엔 버거운 나이다.

하지만 황 장인은 아직도 배움에 목이 마르다.

지난 15일 열린 회고전 개막식 때 황 장인의 인사말에서, 이러한 그의 열의가 잘 드러났다.

비록 졸작이지만 잘 봐 주시고, 잘못된 부분에 대해 채찍을 내려주시고, 앞으로도 여러 가지로 지도편달을 바란다라는 말로 인사말을 마무리했다.

 

24세에 전승공예 배움 시작

이번에 공개된 황 장인의 작품들은 종합 예술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귀금속 공예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승 문화 재현 과정에서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는 문인화, 서예 분야에서까지도 이미 일가를 이루었음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황 장인의 작품 세계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

황 장인의 전승공예를 위한 배움의 길은 멀리 20대 나이로 거슬러 올라간다.

25세 되던 해인 1964년부터 1966년까지 김정섭 중요무형문화재 35호 조각장에게 금속공예전통기법과 조각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46세 되던 해인 1985년부터 1990년까지 일중 김충현, 벽산 김창섭 서예가에게 서예를, 남주 홍신표 한국화 화가에게 문인화를 배웠다.

이 분들은 공히 당대를 풍미한 최고의 스승들이었다.

 

40대에 문인화, 서예까지 터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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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장인의 붓글씨 작품. 황 장인은 전승공예 뿐 아니라, 붓글씨, 문인화, 한학 부문에도 깊은 조예를 갖고 있다. 


선생님들의 강의 방식은 매우 엄격했어. 일주일에 한 번씩 사사를 받으면, 그 다음 강의 때까지 해야 될 숙제를 내주시지. 그럼 그 숙제를 마무리하지 않거나, 결과물이 기대에 못 미치면, 그 숙제 완성도가 높아질 때까지, 계속 반복적으로 동일한 과제를 내주셨지.”

이렇게 해서 황 장인은 세 분의 스승들로부터 2-3년간씩 집중적으로 사사를 받았다.

 

더운 여름날이었어. 낮에는 사업이다 뭐다 해서 바쁘니, 주로 과제는 밤에 해야 했지. 숙제를 해가느라고, 팬티만 차고 낑낑거리며 밤새도록 글씨를 쓰고 또 쓰고,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는 업계에서는 드물게, 서예, 문인화 분야뿐 아니라, 불교, 유교, 한학 등 전통 사상 및 학문 분야에서도 조예를 닦을 수 있었다.

 

작업 중 실수, 허용할 수 없는 이유?

이번에 선보인 황 장인의 작품들에는 그의 이러한 전승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기량이 잘 투영돼 있었다.

하나같이 그의 인생을 건 작품들이었다.

백제 부여시대 유물인 사리장엄구는 재현하는데 꼬박 10개월의 세월이 흘렀다, 가야시대 유물 사이호7개월, 고려시대 유물 은잔 은탁은 5개월의 작업 기간이 소요됐다.

이러한 작품들은 한참 만들다가도, 문양이 한 치라도 어긋나면, 녹여서 다시 만들 수밖에 없다. 고도의 집중력이 요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황 장인에게 실수를 하면 안 되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작품은 처음 만들 때 가장 잘 만들어져. 두 번째 만들면 아무리 해도 처음 만들 때에 비해 작업이 잘 안돼. 정성이 처음만 못하고, 몰입하는 게 더 어려워.”

그래서 그의 전승공예 작품들은 모두 세상에서 유일한 작품들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작품들은 하나같이 완성도가 빼어나다. 새겨진 봉황, , 사군자 문양들이 마치 살아 숨쉬는 듯 하고, 전체 구도와 비례가 마치 기계로 찍어낸 것처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다들 국보급 문화재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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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춘 시인이 지은 시 '황갑주론'
 

깊게 스며있는 법고창신의 정신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사자성어는 18세기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이 설파했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이다.

황 장인의 작품에는 일관되게 이같은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

백제·부여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사리장엄구의 경우, 원래 금은동 사리함 3종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리고 금과 은으로 된 사리함에는 문양이 없었고 동 사리함에만 백제의 27대 왕인 위덕왕이 죽은 왕자의 넋을 달래기 위한 문구가 표기돼 있었다.

황 장인은 이 유물을 재현하면서, 금 사리함 재료를 은으로 바꾸고, 문양이 없던 두개의 사리함에도 야생화, 인동당초 문양, 그리고 우리나라 8군자를 새겨 넣었다.

고구려 시대 유물을 재현한 청룡백호화병 작품도 마찬가지다. 원래 흑토기 형태로 발굴됐는데, 재료를 보관성이 좋은 은으로 바꾸고, 사학자들 고증을 받아 무용총 벽화에 나오는 청룡 백호 문양을 새겼다.

이같이 그의 손을 통해 우리나라 전통 유물들이, 하나둘 현 시대의 창의적 관점으로 속속 재현되고 있다.


가장 많은 수의, 국보급 귀금속 작품 전시

이번 회고전에서는 전승공예 작품들, 각종 신변장신구, 황 장인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척한 장르인 문자투각 작품들 포함 총 700여 점의 작품들이 전시됐다.

그 중 고조선 시대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 3국 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작하는데 5개월여 이상 걸린 보물 재현 대작들만 총 50여 점이 출품됐다.

이같이 많은 수의 귀금속 전승 공예 작품들을 한꺼번에 접하기란 쉽지 않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도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귀금속 전승 공예 유물들은 그리 많지 않다. 전국적으로 발굴된 귀금속 유물들은, 출토된 지역 인근의 박물관에 각기 분산돼 소장돼 있다.

그런 면에서 황 장인이 추진하고 있는 기증관 건립은 예사롭지 않다.

만일 건립된다면, 귀금속 부문 국보급 작품들 수십여 점을 한 곳에서 접할 수 있는 귀한 박물관이 될 것이다.

황 장인은 이번에 전시된 작품 들 이외에도, 앞으로도 만들어질 작품들, 그 외 현재 소장 중인 전승공예 작품들 중 최대한 엄선하여, 기증관에 기증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나 수도권 인근의 지자체에서 기증관 건립을 제안해 온다면, 아낌없이 기증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평생을 다해 귀금속 부문의 역사를 오롯이 재현하고자 만든 작품들이다.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보여주고, 전승 공예가 전승될 수 있다면 더 이상 여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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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하 수필가가 쓴 '대장인의 맥과 멋'
 

인간문화재 추천 제안, 완곡히 거절

 

최근 국가무형유산기능협회 관계자가 황 장인을 인간문화재로 추천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 왔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금은과 같은 귀금속 공예 부문 인간문화재는 한 명도 지명된 바 없다.

아직 인간문화재 지정 대상 분야에 귀금속 공예 부분은 포함돼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귀금속 분야가 인간문화재 대상 분야로 지정되고, 황 장인이 인간문화재로 선정된다면, 귀금속 공예 부문 최초 인간문화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황 장인은 인간문화재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실제 인간문화재로 지명되면, 소정의 정부 지원금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부의 요구가 뒤따르도록 돼 있다.

황 장인은 지난 2012년 서울시로부터 기금을 받아 백제시대 은잔 은탁 작품을 재현할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의 지원을 받다보니, 다양한 관여와 부대 조건들의 이행 요구가 이어졌다. 작품 제작 자체에 몰두하는데 지장이 많았다.

인간문화재로 지명받는다 하더라도, 또다시 작품 작업 이외의 일로 신경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언제까지 작품활동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1년에 최소 한 개씩은 계속 전승 공예 유물들을 재현하는데 몰두하고 싶다.”

 

*** 85세 황갑주 장인 작품 활동, 언제까지?

아직도 왕성한 체력에, 명료한 정신 건강 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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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장인은 국보급 소장품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소장품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회고전 당일 방문 예정인 내빈 소개를 위해, 미리 직함과 성함 목록을 준비해 뒀었지.

그런데 바쁘다보니 그걸 연구소에 놓고 나와 버린 거야. 할 수 없이 그냥 행사장에서 보이는 대로 내빈들을 소개하는데, 아마 여러 분들을 빠뜨렸을 거야. 너무 죄송해서...”

회고전 종료 후 황갑주 장인을 찾아뵈었더니, 황 장인이 말씀하셨다. 사실 회고전 행사장에서 황 장인이 메모지도 없이, 내빈들을 일일이 거명하며 소개하는 것을 유심히 봤었다.

 

, 대단하시네. 어떻게 메모지도 없이 그 많은 분들의 직함과 성함을 저렇게 정확히 기억하시는 거지?’

85세 노인의 총기치고 믿을 수 없을 수준이었다. 행사장을 가득 메운 내빈들 중 40여명을 그렇게 보이는 대로 막힘없이 소개했다.

단 한 사람만 직함을 소개한 다음 , 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질 않네라며 참석자들의 도움을 받아 소개했을 정도였다.

 

이어 황 장인에게 건강은 괜찮으세요하고 여쭤봤다.

행사 후 병원에 갔더니, 맥박이 약해졌다면서 며칠 쉬라는 거야. 그래서 3일간을 꼬박 쉬었지.”

6일간의 행사 기간 동안 심층 인터뷰 차 모두 세 번을 뵈었다. 행사 첫날인 15(), 19(), 그리고 마지막 날인 20().

그런데 황 장인은 시종 도와주는 사람 거의 없이, 모든 일을 거의 다 직접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회고전 종료 후 짐을 쌀 때, 짐 포장을 도와주러 온 사람들은 다 점심을 사먹고 오라며 내보내고는 혼자만 남아, 이런 저런 일을 챙기려 할 정도였다.

행사 기간만 6일간이었지, 어떻게 보면 연구소와 집에 산재해 있는 작품들을 꾸리는 일부터, 전시장으로 가져와 작품들을 설치하는 작업들, 또 행사 종료 후 짐을 옮겨오고 또 푸는 작업까지 치면 거의 보름여 간의 기간을 그렇게 종종대며 보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젊은 사람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일인데...

 

과연 이런 불가사의한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여러 모로 생각해 봤다.

집념의 결과는 아닐까. 무언가 해내고야 말겠다는 굳은 정신력 때문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반인에게서 보기 어려운 놀라운 체력과 명석함, 그리고 치열한 소명의식의 결과 오늘의 놀라운 업적을 이룬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됐다.

앞으로도 내내 지금처럼 건강하셔서, 아직도 못다 이룬 한민족 귀금속 5천년사의 완성이라는 대업을 꼭 이뤄내시길기원드렸다.

 

정이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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