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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 주얼리 업계 최초 ‘종신 명인’, 남송 김상실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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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귀금속보석신문 댓글 0건 조회 426회 작성일 24-05-2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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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공예의 현대화, 국제화라는 슬로건 항상 마음속에 “제대로 배워, 내 모든 것 가져갈 제자 있었으면”

자개를 이용한 ‘패각공예’의 창시자

스승도 없이 궁중채화의 맥 이어 

보석 활용한 새 회화 장르 개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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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중 벚꽃이 가장 화려하게 핀 눈부신 봄날, 업계 최초로 한국예술문화 종신명인에 오른 업계의 자랑 남송 김상실 명인을 만났다. 지어진 지 족히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공방 건물은 작고 소박했지만, 그의 작품들처럼 고즈넉하고 정겨운 옛 정취를 담뿍 담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작품들로 빼곡한 공방 한가운데에, 한 그루 소나무처럼 김상실 명인이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보석으로 예술작품을 만드는 보석공예의 독창성을 인정받아, 감사하게도 명인 칭호를 받게 되었다.” 

한국예술문화 명인 선정은 한국예총에서 주관하는 제도로, 문화재청에서 선정하는 인간문화재나 노동부에서 선정하는 명장 제도와는 또 다른 커다란 명예이다. 선정된 후에도 3년에 한 번씩 갱신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엄격한 예술 인증 제도이기도 하다. 

김 명인은 자개를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 ‘패각공예’의 창시자다. 그 뛰어난 업적을 인정받아 지난 2013년 보석공예 명인으로 선정된 후, 현재는 종신 명인인 ‘그랜드 마스터’로 지명되었다. 실로 주얼리 업계의 쾌거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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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것이 대체 무엇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 문득 전통 소재인 ‘자개’가 눈에 들어왔다. 서양에선 자개를 ‘Mother of pearl’(진주의 어머니)이라고 부르며 보석으로 취급한다. 

흔히 ‘나전칠기’라는 일제가 만든 이름으로 잘못 알려진 ‘자개옻칠’은 우리 민족이 만들어낸 세계적인 공예기술이다. 우리 민족은 수천년 전부터 완벽하게 세공된 옥 귀걸이를 만들던 대단한 손재주를 가진 민족이었다. 이런 전통공예의 현대화, 국제화라는 슬로건을 마음속에 항상 내걸고 작품을 만들고 있다.” 


전통 공예 소재인 자개는 그의 손길을 거쳐 수많은 현대적인 장신구로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들은 어디서도 볼 수 없던 것으로 많은 사람들의 주목과 사랑을 받으며, 그에게 한국예술문화 명인의 칭호를 안겨주었다. 그는 명인이 되고 나서도 늘 새로운 작품에 목말라하며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경기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제자 길러내

“전통 소재를 이용해 현대적인 장신구를 만드는 것으로 명인이 됐다. 그런데 우리나라 전승공예의 계보를 계속 찾아 올라가다 보니, 어느 결에 ‘궁중채화’라는 장르에 이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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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채화는 조선시대 궁에서 잔치가 열릴 때 주로 선보여졌다. 비단이나 종이 등을 염색해서 만든 꽃을 이용한 장식을 말한다. 그는 세월이 지나며 생화로 대체되어 맥이 끊긴 궁중채화를 자개 등의 소재를 이용해 영원히 변치 않는 새로운 작품으로  되살려냈다. 김 명인의 도전은 계속 이어진다.


“지금은 보석을 가지고 회화 작품을 만들고 있다. 보석으로 그림을 그리는 거다. 이렇듯 보석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작품은 무궁무진하다. 요즘에는 내가 기술을 개발하고, 제자들은 디자인을 개발하게 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많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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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후진양성에 대한 주제로 넘어 갔다.

현재 김 명인은 종로의 ‘남송공방’과 ‘경기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다.


“내 기술은 남녀노소 모두 배울 수 있다. 경기대학교 평생교육원이나 내 공방으로 찾아오기만 하면 된다. 몇 년이고 진득하게 배워서 내 모든 걸 가져갈 수 있는 제자를 찾고 있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모든 걸 너무 빠르게만 이루려고 해서 안타깝다.”


홀로 이루 말 할 수 없는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창안한 기술들을 후대에 훌훌 거리낌 없이 나누고자 하는 옛 스승의 마음이 느껴졌다. 



***남송공방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10길 82-2 

전화번호 010-7254-7400


윤택환 기자



***남송 김상실 명인이 살아온 길 


제목:  신춘문예 등단 시인이기도‘개미와 코끼리의 사랑 이야기’라는  연작시, 300편 넘게 연재 중



“예향의 고장인 전북 고창 출신으로, 서울 산업대(현 서울과학기술대) 기계설계과를 졸업하고 책장사부터 서예학원 강사 등 다양한 사회경험을 했다. 그러다 KT에 입사해 결혼도 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이루었지만, 더 큰 성공을 쫓아 귀금속 유통업을 시작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 잘 됐던 탓일까? 사기꾼들의 협잡과 IMF라는 거센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다.”


모진 폭풍우를 맞으며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가운데, 그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남대문상가에 터를 잡고, 자신의 전공인 기계설계 기술을 활용한 액세서리 제조업에 뛰어들었고, 다행히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원가에서 재료비가 80%에 달하는 귀금속과 달리 액세서리는, 원하는 디자인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계를 내가 직접 만들 수 있다 보니 훨씬 생산성이 좋았다.” 


남대문 상가에서 재기에 성공

그는 다시 성공가도를 달리게 되었지만, 주위에 있는 남대문 동종업계 사람들의 어려움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IMF를 막 벗어나 모두가 힘든 시기였다. 

제품 만드는 법을 가르치며 상인들을 돕자 어느새 그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를 본 상가 운영위 측으로부터 상가를 좀 살려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 김 명인은, 상가를 맡아 운영함과 동시에 자신의 노하우를 본격적으로 가르칠 학원을 차리게 된다. 

그렇게 만나게 된 제자들과 함께 남대문 상가 기반의 공동 브랜드를 설립하고, 또 다시 큰 성공을 거둔다. 당시로서는 거금인 1억원을 들여 온라인 쇼핑몰을 만들 정도였다.


“또다시 상승세를 이어가며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내 안이 텅 비었음이 느껴지더라.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기분이었다. 사업가로서는 어느 정도 성공했으니 이제는 ‘내 것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는 액세서리업 당시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이 개발했던 ‘와이어 기법’을 떠올렸다.

와이어를 한땀 한땀 감아 작품을 만드는 이 기법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으며, 그것을 연구하면 뭔가 작품이 되겠다 싶어, 과감하게 공예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의 작품들은 마치,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조선시대 어느 귀부인의 우아하고 기품 있는 옆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국적인 해학과 아련함을 동시에 담아낸 세밀한 공예 기술이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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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손기술이 좋은 이유(?) 

“한국인이 세밀한 공예를 잘하는 이유는 온돌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양반다리의 생활화로 자연스럽게 익혀진 단전호흡을 통해 손끝이 안정되면서 형성되는 게 아닌가 싶다.”


다재다능한 그는 보석공예가이자 신춘문예지라는 문학지를 통해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개미와 코끼리의 사랑 이야기’라는 연작시를 300편 넘게 엔터스타 뉴스에 연재 했으며 블로그나 SNS에도 꾸준히 일상적인 소재를 기반으로 하는 시를 올리고 있다.


“꾸미지 않는 쉬운 시를 추구하고 있다. 개미와 코끼리의 사랑 이야기는 코끼리를 약자로, 개미를 강자로 두어, 서로 다른 존재가 함께 사랑하며 어우러져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담았다.”

특히 권력들의 불법 편법들을 꼬집는 세태 풍자시를 연재하여 많은 독자들을 확보했다 


“창덕궁 풍물 모임 활동하며 삶 즐겨요”

“24시간이 모자랄 것 같은 바쁜 삶의 원동력이 대체 무엇인가”라고 묻자 김 명인은, “바쁜 시간을 쫒아가려니까 바쁜 것 아니겠나. 시간이야 가든지 말든지 놔두고, 나 좋은 일을 하면서 살면 되는 것 아닐까”라며 우문현답을 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삶을 즐기냐”라고 물으니 “서예가 취미이고, 등단한 시인으로서 시는 인생길의 일부이다” 하고 말하고, “창덕궁 풍물봉사단 회장으로 때때로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한 노력도 많이 하고 있다”라고 답했다. 

“종로 귀금속 업계에 계신 분들도 풍물단에 들어와 함께 배우며 즐기기를 권한다.”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지금까지 표정과는 달리 자세를 바로잡으며 정색하고, 말을 이어간다.


“전 세계 거의 대부분의 패션 브랜드들의 이름이 장인의 이름을 따 명명된다. 그런데 우리 현실에서는 그런 일은 꿈같은 이야기다. 특히 우리 귀금속업계 기술인들은, 업계를 떠나면 이름 한 자 남김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 엄청난 기술들이 사람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히도 한국예총에서 그런 최고의 기술인들을 발굴하여 명인으로 선정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명인들의 업적과 기술을 기록하고 전시하며 전승하도록 하고 있다. 귀금속업계에서도 나 포함 몇 분이 선정되어 활동을 하고 있다.”


이어 김 명인은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내 작품들을 전시해 둘 작은 박물관을 하나 짓고 싶다. 그렇게 해서 내 기술과 작품 세계를 후대에 계속 이어가도록 했으면 좋겠다.”



***김상실 명인 관여, 주한미군 잡지 ‘UNITED ON THE ROK’  


제목:  “잡지에 K-주얼리 우수성도 소개할 것” 미국인들 사이에 한국 주얼리 마니아 많아지길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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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실 명인은 주한미군과 그 가족들을 위한 월간 정보 & 라이프스타일 잡지 ‘UNITED ON THE ROK’ 운영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는 28,500명의 미군들이 주둔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가족과 미군 부대에 고용돼 있는 군속들 및 그 가족들까지 포함하면, 약 30여만 명이 미군 부대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잡지는 이러한 미국인들이 한국과 한국 문화를 접하는 유일한 매체라고 볼 수 있다.”

미군들과 그 가족들은 매일매일 AFKN을 포함한 미국 방송을 실시간으로 시청한다. 반면 정작 자신들이 생활하고 있는 한국에 대해 따로 접할 수 있는 매체가 없다.


“이들은 대부분 국내에서 3-5년간 근무하고, 그 후에는 다른 나라 미군 기지로 순환근무를 하러 떠난다. 그 사이에 만일 우리 한국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즐겁고 유익한 경험들이 쌓이게 된다면, 한국은 가만히 앉아서 훌륭한 민간 외교 활동을 벌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UNITED ON THE ROK’ 잡지는 1987년 창간됐다. 이후 37년간 주한미군 및 그 가족들을 위한 민간 외교의 가교 역할을 톡톡히 다해 왔다. 


“미군과 가족들은 외출을 나오거나, 휴가를 즐기려 할 때, 한국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언제나 영내에서 생활해야 하는데 얼마나 갑갑해하겠는가. 이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잡지는 한국의 관광지와 명소들, 지역 축제, 공연, 전시회 등을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미군들과 그 가족들이 크게 아플 때, 미국까지 가지 않고, 한국의 우수한 의료 서비스를 경험하도록 하는 노력도 펼치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군 부대 측과 한국 의료기관간 가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외에 그는 우리 주얼리 업계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일에도 관심이 많다. 


“미군 가족들 중 특히 여성들은 수시로 영내를 벗어나 쇼핑하기를 즐긴다. 사실 이들에게 남는 것은 시간과 돈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만일 한국의 우수한 주얼리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면 마니아들이 많이 늘어날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라 한국 주얼리 업계를 대표하는 우수한 브랜드들을 자주 잡지에 소개할 계획이다.


“이 같은 잡지에 브랜드를 소개하고자 하는 우리나라 주얼리 업체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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