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과 인생] 진용석 귀금속공예 1호 명장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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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귀금속보석신문 댓글 0건 조회 2,920회 작성일 19-03-18 13:56본문
“귀금속의 아름다움에 빠져 48년 외길 걸었죠”
일본·미국서 대한민국 세공기술 우수성 알리기도
지난 1988년 귀금속공예 1호 명장으로 선정된 진용석 명장은 귀금속공예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로서 손꼽히는 인물이다. 특히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일본과 미국에서의 활약을 통해 대한민국 귀금속 공예의 우수성을 전파했으며 명장의 손길이 이어질 수 있도록 제자 양성에 힘쓰고 있기도 하다.
그런 그가 재미있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명장에까지 올랐을 뿐이라고 겸손해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전한다는 그의 자부심은 무엇보다도 빛나 보였다. 진용석 명장을 만나 귀금속 공예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부터 귀금속 공예에 대한 열정으로 매진해 온 그의 인생담을 들어봤다.
정교한 세공기술 국제대회서 인정받다
“빛나고 아름다운 보석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한다는 자부심으로 48년의 외길을 걸어왔습니다.”
진용석 명장은 17살에 전북 익산에 있는 귀금속 공장에 입사하면서 세공 분야에 첫 발을 내딛었다. 어려워진 가정환경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또래들에 비해 조숙한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일을 배우는 동안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하기도 했지만,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하면서 그는 귀금속이 발하는 광채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린 채 일에 몰두하기가 일쑤였다. 아름답게 다듬어진 귀금속들이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할 수 있다는 기쁨으로 좀 더 정교하게 귀금속을 깎고 다듬는 데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일본에 있는 한일합작회사로 이직해서도 그는 사내에서 실시된 기술경기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는 등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전국기능경기대회 소식을 접한 그는 21살 되던 1974년 드디어 대회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연이어 그 다음 해에는 국제기능경기대회에서 은메달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의 작품의 정밀도와 아름다움을 높이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 이후 다시 일본 회사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아 10년 동안 일본에서 일하면서 최고급 주얼리를 만들어 냈다. 일본에 진출한 세공기술자 1세대로서 우리나라 세공기술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우리나라의 세공기술은 양손을 사용하는 기술로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따라오지 못하는 독보적인 기술입니다. 속도도 빠르고 고난이도 작업의 처리가 가능하며 더욱 정교한 작업을 섬세하게 해 낼 수 있습니다. 당시 세공기술 쪽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일본업계를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대한민국 귀금속 산업 발전 위해 최선”
일본 회사에 재직 중이었던 1987년, 노동부와 산업인력공단이 첫 개최한 ‘대한민국 명장’ 귀금속세공 분야에서 1등을 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명장으로 선정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주최 측은 명장(1등) 뿐 아니라 2등과 3등 수상자까지도 공석으로 남길 수 밖에 없게 됐다.
다음 해인 1988년 열린 2회 대한민국 명장에 재도전해 또다시 1등을 차지해 그는 드디어 명장이라는 칭호를 받게 됐다. 귀금속 공예 분야 명장 1호이면서 34세의 최연소 명장으로서의 영예를 당당히 거머쥐게 된 것이다.
명장의 칭호를 받은 후 그는 우리나라 명장으로서의 책임을 느끼고 일본 회사를 정리하고 귀국해 주얼리샵을 운영하면서 우리나라 세공 기술의 발전을 위해 후학 양성에 힘썼다. 7명의 제자들이 국제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해 금 5, 은 1, 동 1개를 획득하는 쾌거도 이룩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길이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운영하던 샵의 경영난으로 인해 문을 닫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비가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던가. 미국이라는 기회의 땅에서 그는 세공기술자로서 초심을 다지며 열심히 일한 결과 새롭게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미국에서 금은보화를 누릴지라도 대한민국의 명장이라는 그의 자부심과 책임감은 그의 가슴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4년간의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2012년 귀국한 그는 3D캐드 매트릭스를 손수 배워 귀금속 디자인과 세공기술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좀 더 예술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진용석 명장은 앞으로도 대한민국 명장으로서, 주얼리업계의 대들보로서 더욱 굳건히 그의 길을 갈 것이다.
“우리나라가 세공기술 면에서는 뛰어난 기량을 갖고 있지만, 디자인, 마케팅 등을 통합해서 보면 미국과 일본이 우리나라에 비해 상당히 앞서 있는 추세입니다. 우리나라 귀금속 공예 분야의 갈 길이 멀기도 한 한편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열려 있기도 한 것입니다. 세공기술 뿐 아니라 디자인 분야도 향상돼 세계에 나가서 경쟁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올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귀금속산업의 발전을 위해 저도 앞으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박영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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