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달의 귀금속보석인] 신라공방 박정래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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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귀금속보석신문 댓글 0건 조회 1,631회 작성일 19-03-18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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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 소년, 50여 년 만에 명인 반열에

“전래기법 계승에 여생 바칠 것” 

지난 해 10월 20-21일 이틀에 걸쳐 치러진 ‘제2회 대한민국 귀금속공예, 보석가공, 왁스카빙 명인 선발대회’에서 순금 부문에서도 명인이 탄생했다. 바로 13살 때 순금 세공 분야에 입문하여 50여년 만에 명인이 된 박정래 명인(64, 신라공방). 그의 순금 인생은 초등학교 졸업 후부터 곧바로 시작됐다.


전북 전주에서 5형제 중 맏이로 태어난 그에게 진학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그가 진학 대신 기술을 배우기 위해 찾아가게 된 곳은 당시 전주에서 가장 큰 매장이었던 ‘이시계점’. 시계 뿐 아니라 귀금속을 판매했고, 또 귀금속을 직접 가공하기도 했던 곳이었다. 


어린 소년에게 더더욱 귀금속 기술이란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값비싼 귀금속을 다루는 일인데다가, 당시로서는 모든 기술이 도제식이었다.
그래서 출근해 매일 매일 하는 일이란 고작 청소와 같은 허드렛일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잠깐 잠깐 짬이 날 때마다 선배들의 손놀림을 유심히 지켜보곤 했다. 그리고 모두 일이 끝난 후 저녁에 스스로 그 과정을 시연해보곤 했다.


유난히 손놀림이 맵고, 눈썰미가 좋았던 그는 그로부터 3-4년이 지나면서 서서히 중기술자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은 한창 고등학교를 다닐 나이였다.


‘순금 분야 명인 매우 이례적’

그 후 그는 32세 무렵 서울 영등포에 상경하여 큰 도전에 나섰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금 주조 공장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로선 그처럼 금 제작 전 공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해내는 기술자는 그리 많지 않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의 사업은 일취월장 발전하기 시작했다.


일하는 사람도 30여 명으로 불어날 정도였다. 하지만 40대 초반이 되자 시련이 닥쳐왔다. 사기를 크게 당했고, 공장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온 가족은 빈털터리가 돼 옥탑방 신세로 전락했다.


이런 고난의 세월은 길게 이어졌다. 한데 40대 말쯤이 되자, 그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핸드폰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핸드폰 고리를 금으로 만들어 선물하는 관행이 급속히 퍼져갔다.


이렇게 되자 또 다시 그의 실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금 고리는 좀 더 디자인이 특이했고 다양했으며, 맵시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제품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현재 그는 금은방으로부터 고금을 받아 위탁가공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사실 순금 제품 작업은 합금 제조 작업과 다르다. 도면화하여 수치를 재면서 작업하는 방식이 아니다. 정해진 틀이 아닌, 순간순간의 영감에 따라 작업이 이뤄진다. 이런 와중에서 이번 대회 결과 그가 명인 반열에 들어선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이다.
그 또한 “수년 전부터 이같은 대회에 출전하고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히고, “이를 위해 도면에 따라 수치를 재면서 작업을 하는 습관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평소 도면과 자의 도움이 없이도 그린 듯이 순금 제품을 만들 수 있었던 그였다.
그 결과 그는 이번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박 명인은 “앞으로 전래기법을 이어받고 계승하는데 여생을 바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장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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