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명장과 인생] 김종목 금은세공 분야 제3대 명장

페이지 정보

작성자 귀금속보석신문 댓글 0건 조회 2,144회 작성일 19-03-21 22:05

본문

삶에 있어서도 진정한 명장의 길로...

강원도 산골 17살 소년, 귀금속보석업계 지도자로 우뚝

 

4848b5df31e7d4379244ff2002481b58_1553173530_75.png

대한민국 명장제도의 가장 중요한 취지는 장인으로서의 기술력을 겸비했을 뿐 아니라, 어느 한 분야의 명장답게 타의 모범을 보이며 업계의 발전을 위해서도 기여하는 인재를 배출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종목 제3대 금은세공 분야 명장은 MJC보석직업전문학교를 설립해 후진을 양성하고 한국귀금속보석단체장협의회 회장을 맡아 업계의 발전을 도모하는 등의 활동을 해 왔으며, 최근에는 나석에 대한 개별소비세를 폐지하는데 앞장서 업계 양성화에 날개를 다는 데 크게 기여하는 활동을 해 왔다.

지난 1990년 명장 선정 당시에는  전국명장부기능경기대회에서 최고의 기술력으로 금메달을 수상하여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되었고, 선정 이후 그는 귀금속보석업계에 많은 기여를 해옴으로써 명장으로서 귀감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처음 견습생 때 너무 힘들었어요”

17살의 어린 나이에 고향인 강원도 양양을 뒤로 하고 기술을 배우러 상경한 김종목 명장은 형님 친구가 보내준 전단지를 보고 한국보석학원이라는 곳을 알게 되면서 귀금속업계에 첫 발을 들이게 됐다. 다른 사람들보다 손재주가 더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썰매나 도장 등을 만들기를 좋아했던 그가 이 전단지에 특히 관심을 갖게 돼 귀금속보석업계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그는 학원에서 6개월 동안 보석감정과 세공 등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서울 중구 명동의 귀금속 제조공장인 신아사라는 곳에 취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취업 후 그는 열악한 근무환경과 견습생에 대한 부당한 지시 때문에 회사생활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1주일 만에 그만두려고 했다.

하지만 누나의 권유로 회사에 한 달이라도 다니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그는 밤늦은 시간까지 학원에서 배운 내용들을 연습하는 등 열정과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에 3개월 후부터는 사장이 아예 그에게 열쇠를 맡길 정도로 신임을 얻게 됐다. 또한 손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밤을 새서라도 제품을 만들거나 수리해내는 집념과 책임감으로 회사로부터 더욱 두터운 신뢰를 받게 된 그는 입사 4년차 되던 어느 날 회사로부터 지방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해보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러나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도면 보는 방법을 애초부터 배워본 바가 없었던 그는 기능경기대회에서 아예 작품을 시간 내에 완성조차 못하게 된다. 그는 여기서 끝낼 수는 없었다. 국제기능올림픽대회 금메달리스트 선배가 근무하는 충청북도 청주의 한 귀금속 공방을 찾아가 국내외 기능경기 대회 과제를 복사해 와서 연습에 매진하였다.

그 다음해인 1979년 드디어 지방기능경기대회와 전국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해 각각 은메달을 거머쥐게 된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려는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주인처럼 일하면 주인이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근성과 열정을 갖고 일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걸 당시 체득했습니다.”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 명장에 오르다


이어 김종목 명장은 1981년 국제기능경기대회까지 도전하게 됐다. 선수촌에서 끊임없이 치러지는 테스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기에 그는 금메달도 거뜬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대회에서 동메달 수상에 그치자 그의 실망과 상심의 정도는 더욱 컸다고 한다. 한편으론 이러한 경험이 겸손함을 배우고 더 열심히 일에 매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도 했다.

또한 역설적으로 1887년 명장제도가 도입되자마자 앞뒤 가리지 않고 출전했던 계기가 됐다. 업계에서 최고로 인정받고자 했던 그는 1990년 마침내 명장 칭호를 받기까지 집에 작업실을 만들어 놓고 밤낮으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투혼을 불태웠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는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국제대회에서 동메달을 받은 후 제가 그냥 주저앉았더라면 명장의 칭호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목표를 이뤄내는 집념이 때로는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한편 그가 명장이 된 다음 해인 1990년 이후 명장선정 제도에서 실기시험이 폐지되었고, 1991년부터는 서류심사와 현장평가를 통한 명장선발제도로 바뀌었다.

그러나 명장이 된 후 청와대 초청만찬에서부터 그는 귀금속보석 분야는 사치소비품이 아니라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업계의 발전을 위해 후진을 양성하겠노라고 약속했을 정도로 업계의 앞날을 걱정하는 진정한 명장다운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MJC보석학교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김종목 명장은 1981년부터 충무로에서 세공공방인 럭키보석을 운영하면서 업계에서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으로 통했다. 또 아랫사람이 윗사람한테 선물을 주는 것은 뇌물이라며, 납품업체에 선물주기를 거부하는 올곧은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그와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그와 꾸준히 거래를 트고, 주위사람을 소개하기도 해 그는 점차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명장으로 선정된 직후 청와대에서 업계 발전을 위해 후진을 양성하겠다고 한 약속은 오래도록 그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어코 그는 1997년 관인 김종목귀금속가공학원을 열기에 이르렀다. 당시 직업전문학교로 인가를 받기 위해서는 3년간의 운영 경험과 일정 인원이상의 수강생을 배출한 경력이 있어야 신청이 가능했다.

힘든 IMF 시절이었음에도 학원운영의 막대한 어려움과 많은 손실,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3년을 버텨내고 마침내 직업전문학교 인가를 받아냈다. 2006년에는 감사원으로부터 6개월간 감사를 받으면서 그는 모든 관리를 투명하고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을 되새겨, 2007년에는 교육부로부터 학점인정교육 기관으로 지정받아 전문학사과정도 함께 운영했다. 2011년 종로로 이전한 후 최근 4년간 우수훈련기관으로 인정받았다. 학교설립 이후 약 5000명의 수료생을 배출해 수많은 귀금속?보석인제들을 길러내는 요람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박영신 기자

 

“업계 어려움 바로잡는 것이 선배들의 몫”

김종목 이사장, 나석 개별소비세 폐지 등 업계 숙원사업 해결에 기여


김종목 명장은 지난 1992년 한국귀금속보석디자인협회(이하 디자인협회) 설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창단 멤버로서 1994년에는 제2대 한국귀금속보석디자인협회 회장을 맡아 많은 업적을 남겼다. 2011년 MJC보석직업전문학교를 종로의 현재 위치로 이전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업계 발전을 위한 일에도 관여하게 됐다. 2013년 한국귀금속보석단체장협의회(이하 단협) 제9대 회장에 선출되어 2014년부터 단협을 이끌면서 업계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단협 회장 취임식에서 약속한 바대로 국내시장의 귀금속보석에 대한 개별소비세 폐지에 매진해 2015년에는 개별소비세 부과기준을 20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올리고 소매상에 대한 개별소비세 폐지를 이뤄냈으며, 2018년에는 나석에 대한 개별소비세를 폐지하는 내용의 개별소비세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국내 유통에서의 귀금속보석에 대한 개별소비세 제도를 개선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단협 업계가 발전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학교를 운영하면서 업계의 미래를 위해 후진을 양성하는 등 업계 발전을 위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데 대해 보람을 느낍니다. 종로로 학원을 옮기게 된 것이 어쩌면 업계를 위해 봉사하라는 하늘의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웃음). 업계에 진출할 새로운 세대들을 위해 선배들이 어려운 점, 잘못된 점을 해소하고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도 업계 발전을 위한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저작권자ⓒ 한국귀금속보석신문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