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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 돌이켜 본, 지난해 한여름 두 거장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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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귀금속보석신문 댓글 0건 조회 825회 작성일 23-03-21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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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 공예와 함께해 온 두 거장들의 삶, 남는 것은?

명예도, 부(富)도, 보람도 아닌, 그저 각박한 세상살이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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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한여름이었던 8월 13일, 울산에서 뜻깊은 만남이 이뤄졌다. 주얼리 전승 공예의 최고봉을 이루는 두 거장이 만나게 됐다. 한 사람은 우리나라 전통 은장도(銀粧刀) 제조의 한 기법인 오동상감기법의 전수자 장추남 장인(93)이었다. 
또 한 사람은 우리나라 5천 년 국보급 문화재 재현의 권위자인 황갑주 장인(85)이었다. 황 장인이 더 늦기 전에 장 장인을 만나 뵙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한국장인협회 박정래 전 회장이 중간에서 주선하여 이 귀한 만남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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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 중구 성남동 소재 장추남 장인의 공방 ‘고정민예사’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그러자 망치로 은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8월 땡볕 더위 속 공방은 작고 더웠다. 낡은 선풍기에 의지해 장추남 장인이 한창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에어컨도 없는 옛날식 작업장인데도, 망치를 든 장추남 장인의 팔에서 만만치 않은 근력이 느껴졌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뵙게 돼 반갑습니다.” 
장추남 장인의 건강해 보이는 모습에 고무됐는지, 황갑주 장인의 목소리가 매우 밝았다. 장추남 장인이 작업을 멈추고 넌지시 방문객들을 바라다보았다.
장추남 장인은 1930년생이다. 1947년(17)부터 담뱃대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군대를 제대하고 24세(54년) 때부터 김덕영 장인에게 장도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68년의 세월이 흘렀다.
바로 그 해에 황갑주 장인 또한 고향인 전남 순천에서 귀금속 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거의 비슷한 세월 동안 정진에 정진을 거듭해 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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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선배님처럼 한 95세까지는 일을 하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황갑주 장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보통 몇 시간씩 일하세요.” 
“7시 반이면 나왔다가, 오후 2시경이면 들어갑니다.”
황갑주 장인이 갖고 온 모퉁이를 풀면서 “오래도록 건강하고 화평하게 사시라고 준비했습니다.”라고 말했다. ‘和睦(화목)’이라고 쓰여진 문자 투각 작품이었다. 
문자 투각(구멍을 뚫는 방법) 공예 기술은 황 장인이 국내에서 처음 시도했다.
한문의 오체(해서 행서 초서 예서 전서)를 은판 투각으로 섬세하게 그려내는 기법이다.
이어 황 장인이 자신을 소개했다. 

“그 동안 전통 공예품을 복원한 300여 점의 작품들을 모아, 지난 2015년 11월, ‘귀금속공예 입문 61주년 회갑 작품전’을 열었어요. 그리고 내후년인 2024년엔 ‘귀금속공예 입문 70주년 고희 작품전’을 열 계획입니다.”
고희전에서는 중국에 남아있는 고조선의 유물들을 재현해, 장엄한 5000년 역사의 멋과 맥을 펼쳐 보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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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서 울산이 은장도의 고장이 됐을까요.”
“울산 병영동 일대에 조선시대 경상좌병영이 설치돼 있었어요. 그래서 각종 무기를 만드는 지역으로 명맥이 이어져 왔지요.”
그래서 장추남 장인이 이 곳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곳엔 은장도 뿐 아니라 각종 칼 만드는 공방들이 무척 많았다. 하지만 점차 모두 사라지고, 현재는 장 장인의 친구인 임원중 장인이 운영했던 고려민예사와 장 장인의 공방 두 곳만 남아 있다.

“임원중 장인과 또 다른 친구인 허균 장인 모두 이젠 작고했지요. 그리고 저와 같이 공방을 운영해온 친형님인 장정환 장인도 돌아가셨습니다.”
임원중 장인은 1997년 울산시 제1호 무형문화재 장도장으로 지정된 바 있다. 이 후 2004년 그가 세상을 뜬 후, 아들(임동훈)이 기술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허균 장인은 57세를 일기로 이른 나이에 세상을 하직했다. 이어 그 기술은 아들(허명)에게 이어졌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현재 가업을 중단했다. 
이외에 임원중 장인의 사촌 중 1987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장도장에 지정된 임차출 장인이 있다. 그는 일찍이 울산을 떠나 경남 진주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의 기술은 그의 아들인 임장식 장인에게 이어졌다.
은장도 기술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1세대들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이가 장추남 장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울산시는 2019년 1월 3일, 그 동안 공백 상태에 있었던 울산광역시 지방 무형문화재 제1호 장도장에 장추남 장인을 새로이 지정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의 기술은 앞으로 어떻게 전수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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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전부터 제가 이어받으려고 하고는 있는데, 형편이 여의치 않습니다.”
장 장인의 아들 경천(61) 씨가 답했다. 
그는 플랜트 배관 기술자다. 현실적으로 아무리 장도를 만들어놔도 잘 팔리지 않는 실정이다. 할 수 없이 생계를 위해 배관 일을 주로 나가게 된다. 그러면서 간간이 아버지로부터 기술을 배운다. 
“아무래도 집중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기술 전수를 받고는 싶어도, 여건이 받쳐주지 못하고 있는 거죠.”라고 경천 씨는 말한다. 
자칫하면 대가 끊길 수 있는 상황이다. 

“정부나 자치 단체가 조금만 신경쓰면 충분히 장인들의 경제적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대기업이나 중견기업들, 지역의 경제인들이 연중 쓰는 선물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한 선물을 전통 장인들의 전승공예 작품들을 구입하여 활용한다면 좋을 겁니다. 주는 사람도 적은 비용으로도 크게 생색을 낼 수 있고, 받는 사람도 뭔가 범상치 않은 전승 공예 작품을 선물로 받으니까 특별하게 느껴질 텐데요.”
황 장인이 안타까워했다. 
얘기를 나누는데, 장 장인의 콧물이 연신 흘러내렸다. 황 장인이 경천 씨에게 콧물을 닦아 드리라고 하면서 곡절을 물어 보았다. 장 장인이 대답했다.

“6·25 때 한 쪽 눈을 크게 다쳐, 얼굴 한 쪽 편에 마비 증상이 왔어요. 그래서 사시사철 언제나 다친 쪽으로 콧물과 눈물이 흐르지요.”
이런 연유로 그는 5급 장애인으로 정부로부터 국가유공자 연금을 받는다고 한다.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사실 정부의 국가유공자 연금이 없었다면, 장도 일을 벌써 그만뒀을 겁니다. 제 경우는 그나마 근근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다른 기술자들의 경우 생활이 유지되지 않으니, 이미 진즉부터 하나둘 업계를 떠나갔어요.”
장 장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저 물 흐르는 대로, 머리 하고 싶은 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앞으로 산다면 얼마나 살 수 있겠어요. 아들이 대를 잇는다니,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장도를 만들어야지요. 언제 그게 팔릴진 몰라도, 그래도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될테니...”
대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하루하루 그로 하여금 공방으로 이끄는 것일까. 이 대목에서 황 장인도 동병상련의 정이 느껴졌다. 
그 또한 매일매일 어떻게 대를 이을 것인가하는 문제가 삶의 가장 큰 숙제이기 때문이다. 
전승 공예와 함께해 온 한평생 외길, 이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명예도, 부(富)도, 보람도 아닌, 그저 각박한 세상살이일 뿐일까.
상경길 내내 고달픈 전승 공예 장인들의 삶이 눈에 계속 아프게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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